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 가치는 누가 정하는가
AI 시대 가치를 정하는 기준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들어가며 —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기 시작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막 보기 시작했는데 꽤 재미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라는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던 구교환님이 나와서 보는 즐거움도 있고요. 그런데 솔직히 드라마보다, 이 제목 한 줄이 며칠 동안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드라마 제목인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영감을 받아, AI 시대와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을 나눠 보려고 합니다.
얼마전 김진영님의 ‘AI 시대, 진짜 희소한 것은 휴먼 터치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스타벅스의 역설이 나옵니다. 시가총액이 어마어마한 스타벅스가, 자동화를 줄이고 바리스타를 더 뽑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2024년 스타벅스 CEO가 된 브라이언 니콜(Brian Niccol)이, 매장을 다시 ‘제3의 공간’으로 되돌리겠다며 내놓은 “Back to Starbucks” plan입니다. 그리고 소비자의 반응이 좋습니다. 그 이유를 김진영님은 이렇게 짚었습니다. 집에서 더 좋은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커피가 아니라 바리스타와의 연결을 사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AI가 점점 인간의 영역까지 넓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AI와 정면으로 대결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인 부분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결국 AI를 넘어서고 나 자신의 가치를 되찾는 길이 아닐까요. 스타벅스의 ‘Back to Starbucks’처럼요.
AI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란 무엇이고, 누가, 어떻게 그것을 정하는가?’
▶ 이 글은 영상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가치란 무엇인가 — 사물 안에는 가치가 없다
저는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하고 싶습니다. 가치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가치는 사물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이것을 ‘가치의 역설’로 설명했습니다.
물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지만, 물로는 거의 아무것도 살 수 없다.
반대로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거의 없지만, 매우 많은 다른 재화와 교환될 수 있다.
즉 그는 가치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눈 것입니다.
한 세기 뒤 카를 멩거를 비롯한 한계효용 학파는 이것을 주관적 가치론으로 체계화합니다.
물건 자체에 원래부터 가치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특정 상황에서 얼마나 원하느냐가 가치를 만든다.
게오르크 짐멜은 『돈의 철학』(1900)에서 이것을 인간의 욕망과 관계의 문제로 더 깊이 확장합니다.
어떤 물건이 원래부터 가치가 있어서 갖기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쉽게 가질 수 없고, 얻기 위해 시간과 노력, 기다림,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가치 있다고 느낀다.
즉 가치는 사물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하고 평가하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어렵게 굳이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원리를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덩이와 생선을 동시에 던져 주면 고양이는 망설임 없이 생선을 뭅니다.
사람은 금을 집습니다.
고양이에게는 생선이 금보다 가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금이 생선보다 더 가치 있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둘 다 옳습니다.
왜냐하면 가치는 사물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평가하는 존재의 결핍과 필요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폐 자체만 놓고 보면 그것은 단지 잉크가 묻은 종이 한 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돈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믿고, 교환의 기준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가치를 갖게 됩니다.
즉, 가치는 사물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과 필요, 그리고 관계와 합의 속에서 탄생합니다.
가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인간의 한계를 메우는 것에
그러면 가치의 정도는 어떻게 정해질까요. 더 뛰어난 것에 더 큰 값이 갈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해 볼게요.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비디오테이프 포맷 전쟁이 있었습니다.
VHS와 베타맥스가 맞붙었는데, 화질은 베타맥스가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고른 것은 베타맥스가 아니라 VHS였습니다.
이유는 품질이 아니었습니다.
VHS는 더 많은 회사에 문을 열어 기기와 테이프 값이 빠르게 내려갔고, 영화 한 편을 통째로 담을 만큼 녹화 시간도 길었습니다.
베타맥스는 소니 혼자 끌고 가느라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좋은 엔진을 가진 회사가 자동차 시장을 이기는 게 아닙니다.
정비소와 부품과 주유소와 판매망까지 갖춘 쪽이 시장을 가져갑니다.
VHS는 베타맥스보다 화질은 떨어졌지만, 사람의 일상에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치 경쟁에서 이긴 것입니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가 평생 이야기한 모방적 욕망(mimetic desire)도 같은 결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물건 자체가 좋아서 원하기보다, 남이 원하니까 나도 원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학자 알렉스 이마스와 마다라즈의 최근 연구는 이것을 숫자로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나만 가질 수 있는 것’에 두 배 가까운 돈을 기꺼이 낸다고 합니다.
이것을 증명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예술품은 ‘나만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값이 44% 올랐다.
그런데 AI가 만든 예술품은 그 절반도 안 되는 21%밖에 오르지 않았다.
품질이 같아도 그랬습니다.
AI가 만들었다는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이건 얼마든지 복제되겠지”라고 느끼고 값을 깎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치가 정해지는 여러 방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모든 것의 가장 밑바닥에, 더 본질적인 이유가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의 유한한 생명, 제한적인 몸과 정신,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모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근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전거와 자동차와 비행기에 가치를 매긴 것도, 그것들이 우리 몸의 한계를 메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짐을 들지 못하는 한계를 기중기가 메워 주고, 빨리 계산하지 못하는 한계를 컴퓨터가 메워 줍니다.
인간은 늘 자신의 한계를 메워 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해 왔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간 본질의 가치는 낮게 평가되어 왔습니다.
이 두 줄이 이 글의 척추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이유, 그리고 AI 시대에 그 싸움이 더 격렬해질 이유가, 모두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왜 무가치함을 느끼는가 — 사람의 가치도 사물의 가치와 같다
이제 드라마 제목으로 돌아옵니다.
사물의 가치가 그러하다면, 사람의 가치도 정확히 같은 원리로 움직입니다.
제가 대학시절 농활을 갔다가 느낀 점입니다.
그 마을에 칭찬이 자자한 형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부지런하다는 것이었어요.
새벽에 일어나 밭에 나가 하루 종일 일만 하신다고요.
그 형님은 마을에서 인정받았고, 지금도 잘 사실 겁니다.
같은 마을에 농사는 안 짓고 술 마시며 사고나 치던 다른 형님도 계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분을 흉봤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렵의 시대였다면 어땠을까요.
평소엔 놀다가도 식량이 떨어지면 나가 짐승을 잡아 오는, 그 거친 형님이 오히려 더 칭송받았을지 모릅니다.
전쟁의 시대였다면 그분의 값은 훨씬 더 높았을 수도 있죠.
사람 그 자체에 정해진 값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그 시대가 이어지는 동안만 값이 붙는 겁니다.
상황이 바뀌면 그 사람의 값도 바뀝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것을 ‘장(場, field)’과 ‘자본(capital)’ 이론으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자본’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돈만이 아닙니다. 그 판에서 값나가는 모든 것 — 돈, 학력, 인맥, 평판, 솜씨 — 을 다 자본이라고 부릅니다.
농촌에서는 부지런함이, 학계에서는 학위가, 사업판에서는 돈이 그 판의 자본입니다.
즉 무엇이 값진 자본인가는, 그 판을 지배하는 규칙이 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GenAI가 까발린 Human Creativity의 하찮음’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데요. 거기서 서장훈과 강호동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농구 실력으로 사람의 값을 매기는 사회라면, 서장훈은 재벌이 되고 강호동은 거지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강호동이라는 사람이 서장훈보다 덜 가치 있는 건 아닙니다.
사회가 농구 대신 씨름으로 값을 매기면, 이번엔 거꾸로 강호동이 부자가 되고 서장훈이 거지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사실 하나를 다시 만납니다.
사람조차도, 인간 외적인 기준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인을 ‘시장형 인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시장의 상품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자신의 가치를 그 상품이 받는 시장가치와 동일시한다.
자기의 사회적 가격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를 잃습니다.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의 싸움은, 바로 이 외적 평가의 함정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은 왜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가 — 인정을 향한 투쟁, 그리고 악순환
그런데 왜 ‘느끼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싸우는’ 걸까요.
왜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통증이 되고, 그 통증은 평생의 싸움이 될까요.
저는 이것이 사람의 깊은 본성과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자기 값을 정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때 비로소 ‘나는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이것을 평생 연구해 『인정 투쟁』으로 정리했습니다.
사랑받고, 권리를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쓸모를 인정받는 그 인정이 무너질 때, 사람은 단지 불편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싸웁니다.
무가치함과의 싸움은 사실 ‘인정받고 싶다’는 싸움입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통증에 ‘지위 불안’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회가 정한 성공의 기준에 못 미칠 때, 우리는 가난해지는 것보다 사랑과 존중까지 잃을까 봐 더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이 우리를 끝없이 싸우게 만드는 엔진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한 사람의 통증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로 번집니다.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 사람은 더더욱 자신의 무가치함에 짓눌립니다.
어떤 사람은 의기소침해지고, 어떤 사람은 분노와 적대감을 키워 주위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런 흐름은 사회를 더 비인간적이고 삭막하게 만듭니다.
그 비인간적인 사회 안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무가치함과 소외감과 우울감과 적대감을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다시 사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멈춰야 할 악순환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 사회가 꼭 알아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농구의 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강호동은 하찮아 보일 수 있지만, 사회를 이루는 입장에서 보면 그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입니다.
둘째, 강호동이 본래 무가치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가 고른 룰 때문에 잠시 값이 낮아 보일 뿐입니다.
셋째, 그러니 강호동을 밀어내 사회 밖으로 떠나게 하거나, 사람 그 자체를 낮춰 봐서는 안 됩니다.
강호동이 사회를 떠나면, 그 사회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습니다.
사람 그 자체를 낮춰 보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불안해지고 혼란스러워집니다.
이 셋을 잊는 순간 사회는 흔들리고, 누군가가 힘으로 룰을 뒤집는다면 그 사회의 생명도 거기서 끝납니다.
AI가 바꾸는 세상에서 모두가 무가치함과 싸우지 않으려면 — 가치를 두는 방향을 바꾸자
제가 이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AI의 등장이 우리를, 가치에 대한 그 어느 때보다 큰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AI를 이렇게 봅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메우려고 만들어 온, ‘인간 외적인 가치 부여’의 정점.
AI는 지식을 외우고, 엄청난 양의 문서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더 나은 답을 찾는 일에서 사람을 한참 앞섭니다.
지금까지 값을 크게 인정받던 직업들 — 의사, 변호사, 숙련된 일꾼 — 이 예전만큼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I가 바꿀 룰의 범위는, 전기나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바꾼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넓을 것입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런 시대에 ‘쓸모없어진 사람들(useless class)’이라는 거대한 무리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일로 자기 값을 증명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 자리를 잃을 때,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시대의 가장 큰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더 일찍 예고했습니다.
노동을 찬양하면서, 정작 노동이 사라지는 노동자들의 사회.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이 한 줄이, 지금 우리 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 풍경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그 드라마 제목은, AI 시대를 미리 적어 둔 한 줄 같기도 합니다.
이 격변기에 옛 룰을 그대로 붙들고 사람을 평가하면, 그 사회는 버티기 어렵습니다.
자칫 혼란과 폭력의 세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짧은 우화 하나에서 길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한 재벌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동네 축구팀이 브라질 축구팀을 이길 방법이 있겠냐고요.
재벌은 있다고 답했습니다.
비법을 묻자, 좋은 선수를 영입하는 것도 훈련을 더 시키는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축구 규칙을 정하는 자리에 올라가서, 규칙을 바꾸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인간과 AI의 경쟁이 한창입니다.
지금 룰 안에서는 인간이 AI에게 계속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아주 큰 강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룰은 인간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AI는 룰 안에서 이길 뿐, 룰을 쓰지는 못합니다.
다만, 룰을 바꾸는 것은 도구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룰이 어디를 향하느냐입니다.
저는 그 방향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치를 두는 방향을, 인간 외적인 것에서 인간 내적인 것으로 옮기는 것.
이것이 진짜 해야 할 일입니다.
AI가 만들어 낼 그 큰 풍요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까요.
사실 우리의 창의성도, 능력도, 나 혼자 만든 게 아닙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통과해 나온 결과일 뿐입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AI 자체가,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 온 수많은 관계와 역사와 기록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매도 다시 그 관계들 속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내 세금을 더 걷어라”라고 말하는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AI가 번 돈을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으로 나누자는 샘 올트먼의 말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향 전환’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에서 이야기한 브라이언 니콜의 ‘Back to Starbucks’가 이미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학자 알렉스 이마스는 그 자리를 ‘관계의 영역’이라고 불렀습니다.
AI가 자동화로 물건을 싸게 만들수록, 사람들이 돈을 쓰는 자리는 자동화하기 어려운 쪽으로 옮겨 갑니다.
그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미래의 단단한 일자리는 AI를 감시하거나 프롬프트를 잘 짜는 데 있지 않다. 그건 잠깐 거쳐 가는 자리일 뿐이다. 단단한 일자리는 사람 그 자체가 곧 상품이 되는, 관계의 영역에 있다.
이것이 바로 ‘가치를 두는 방향’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긴 모습입니다.
AI와 싸워서 이기려는 게 아니라, 더 인간적인 자리로 옮겨 서는 것입니다.
AI 시대를 준비할 우리의 자세는,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되찾는 것 아닐까요?
AI가 바꾸는 세상을 인간이 행복한 세상으로 — 유한함이라는 가장 희소한 자원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룰(規則)을 만드는 기준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바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향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은하철도 999 이야기를 다루며 정리했던 제 생각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 제한된 몸과 정신, 그 불완전함이 사실은 모든 가치를 만들어 내는 근본 조건이 아닐까. 인간은 늘 이 한계를 메워 주는 것에 가치를 매겨 왔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인간 본질의 가치는 낮게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AI가 어느 정도의 무한함을 이뤄 낸다면, 이제부터는 오히려 인간의 유한함과 제한됨을 받아들이고, 그 자체의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이건 그냥 감상이 아닙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가 그대로 도착하는 곳입니다.
가치는 늘 가장 귀한 것에 붙는다고 했지요.
AI가 무한한 복제와 기억과 계산을 해내는 세상에서, 가장 귀해지는 건 결국 ‘유한함’ 그 자체입니다.
끝이 있어서, 되돌릴 수 없어서, 이번 한 번뿐이어서 우리의 시간은 의미를 가집니다.
무한히 복제되는 것은 끝내 흔해지고 맙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한 존재’를 말한 것도 같은 뜻입니다.
끝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를 떠올려 봅니다.
철이는 영원히 사는 기계의 몸을 얻으려고 우주 끝까지 갑니다.
그런데 그 긴 여행의 끝에서, 인간답게 살다 죽는 유한한 삶에 더 깊은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포기합니다.
AI가 어떤 무한함을 만들어 내는 지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철이의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도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좋은 삶이란, 돈이나 명예 같은 외적인 것을 쌓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고유한 본성과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사는 데에서 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좋은 삶은 인간 외부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인간 외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데에만 힘을 써 왔습니다.
이제는 인간 내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노력을, 조금 더 많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그 드라마 제목 앞에 섭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저는 이 싸움을 멈출 길이, 더 잘 싸우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I와 대결하려 애쓰는 대신, 더 인간적인 것을 되찾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자리 위에, 인간 본연에 더 큰 값을 두는 룰을 인간의 손으로 새로 쓸 수 있다면 —
그렇다면 AI가 바꾸는 세상은, 사람이 더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그 괴로운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References
→ 영감의 출발점: 넷플릭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구교환 출연)
→ 브라이언 니콜(Brian Niccol)의 “Back to Starbucks” plan: 2024년 취임한 스타벅스 CEO의 회생 전략 — Starbucks 공식 뉴스룸
→ 가치의 희소성 · 관계의 영역: 스타벅스는 왜 바리스타를 더 고용했나 · 원본 영상
→ 룰의 게임 · 베네핏의 관계 환원: GenAI가 까발린 Human Creativity의 하찮음 · 원본 영상
→ 이론적 토대: 김진영, 「AI 시대, 진짜 희소한 것은 ‘휴먼터치’다」 · 원문
→ 글에 녹인 생각들: 애덤 스미스 『국부론』(가치의 역설) · 카를 멩거(한계효용·주관적 가치론) · 게오르크 짐멜 『돈의 철학』 · 르네 지라르(모방적 욕망) · 알렉스 이마스(관계의 영역·희소성, 마다라즈 공동 연구) · 피에르 부르디외(장·자본)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 마르크스(소외) · 악셀 호네트 『인정 투쟁』 · 알랭 드 보통(지위 불안) · 유발 하라리(쓸모없어진 사람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빌 게이츠·워런 버핏(”Tax Me More”) · 샘 올트먼(AI 시대 기본소득 제안) · 마르틴 하이데거(죽음을 향한 존재)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우다이모니아) · 『은하철도 999』


